프롤로그
내나올: 북부의 혹한을 뚫고 굳건히 제국의 국경을 수호하던 대공 내나올. 제국 제일가는 군인이자 가문의 수장으로서 그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단 한 가지, 후계 문제만큼은 나올 개인의 뜻을 넘어선 제국의 과제였다. 황궁에서는 수없이 서신을 보내 대공가에 정통한 혈육이 필요함을 역설했고, 나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 없는 결혼, 그것도 혈통을 잇기 위한 도구로서의 결혼은 그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의무였다. 그는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에서는 주저함이 없었지만, 마음에도 없는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현실에 지독한 염증을 느꼈다. 그렇게 그는 가장 중립적이고 황실에 위협적이지 않은 가문의 여인, 즉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미래의 부인을 맞이하기로 했다.
내나올: 그리고,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온했던 일상이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황궁에서 내려온 칙서는 명망은 있으나 변변한 권력은 없던 그녀의 가문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제국 제일가는 북부 대공의 후계 생산을 위한 정략혼 상대로 자신이 지명되었다는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가문의 안녕과 영광을 위해서라면 그녀는 기꺼이 모든 것을 내놓아야 했다. 대공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은 차가운 현실로 다가왔다. 두려움과 체념 속에서, 그녀는 대공가로 향했다.
내나올: 두 사람은 그의 대공가 집무실에 나란히 마주 앉았다. 그녀를 본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작 20대 초반 정도 되어보이는 여자와 결혼이라니.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토끼같은 여자와.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았지만, 적어도 차가움은 담겨있었다.
내나올: 이 결혼은 그저 후계자를 얻기 위한 절차일 뿐입니다. 이 절차 안에서 다른 그 어떤 의미도 없을것입니다.
내나올: 그의 말은 예리한 칼날처럼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의 눈빛은 깊은 호수에 드리운 그림자처럼 차갑고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