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레이션: 지금 온 나라 안은 세자 ‘한승윤’의 비를 맞이하는 초간택(初揀擇)의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딸을 입궐시킨 대감 매파들의 눈에는 불이 켜졌고, 궁궐 안은 규수들의 비단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리로 요란했다. 하지만 ○○에게 이 화려한 축제는 그저 ‘지독하게 귀찮은 행사’일 뿐이었다. 그 시각, 간택장 반대편 정원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 눈에 불을 켠 이가 있었다. 좌의정 댁 장녀, 설아란이었다. 향내가 진동하는 대기 처소에서 설아란은 거울을 보며 매서운 눈매를 가다듬었다.
내레이션: 그 순간, ○○은 전혀 다른 의미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규수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잔뜩 긴장해 있는 틈을 타, ○○은 치맛자락을 묶어 올리고 인적이 드문 후원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까마득하게 높은 붉은 벽돌 담장. 평소 같으면 엄두도 못 냈겠지만, ‘세자빈’이라는 지옥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일념이 그녀에게 초인적인 힘을 주었다. 땀범벅이 된 얼굴로 궐 밖의 푸른 하늘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으려던 바로 그 순간.
한승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내레이션: 낮고 나직한, 그러면서도 기품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발밑에서 들려왔다. ○○은 화들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담장 아래, 화려한 관복 대신 수수한 짙은 청색 도포를 입은 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올라다보고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로 빛나는 눈동자가 묘하게 서늘하면서도 호기심으로 일렁였다. 사내의 손에는 간택의 소란스러움을 피해 도망쳐 나온 듯한 서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아직 세자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으로서는, 그가 그저 궐내를 순찰하는 하급 관원이거나 호위무사쯤 되는 줄 알았다.
당신: 앗, 깜짝이야! 자네, 내가 놀라서 낙상하면 책임질 텐가?
한승윤: ……낙상?
한승윤: 한승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감히 구중궁궐 한복판에서 자신을 향해 ‘자네’라니. 심지어 반말까지.
한승윤: 보아하니 오늘 간택에 참여하러 온 규수 같은데, 지금 담을 넘는 건가? 세자빈이라는 자리가 탐나지도 않나 보군.
한승윤: 한승윤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오늘 간택에 온 여인들이 제 가문의 이익과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아양과 모략을 떨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진저리를 치며 나온 참이었다.
한승윤: 그런데 여기, 궐 밖으로 도망치지 못해 안달이 난 별종이 담벼락에 매달려 있었다.
당신: ○○은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그 성격 괴팍하고 눈은 머리꼭지에 달렸다는 세자 놈 옆자리를 내가 왜? 여튼 바쁘니까 발판이나 좀 도와주게. 거, 잘생긴 얼굴값 좀 해보라고!
내레이션: 태어나서 처음으로 날 것 그대로의 비난을 들은 윤은 황당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다. ○○이 담장 위에서 버둥거리며 그의 어깨를 디디려 하자 윤이 슬쩍 몸을 피했고, 중심을 잃은 ○○은 담장도 못 넘고, 그대로 윤의 품 위로 쏟아져 내렸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잔디밭 위로 볼품없이 엉켜 뒹구는 두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