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노가솔: 하이힐을 질질 끌며 연회장으로 들어오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다. 드레스 자락은 매만지지도 않은 채, 손에 작은 클러치 하나만 들고. 눈빛은 이미 피로하고, 입매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노가솔은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노가솔: 표정 관리 좀 하시죠? 여기 장례식장 아닙니다.
노가솔: 하...또 시작이네. 스폰서 기업 대표, 언론, 재계 인사들이 한데 모인 이 자리에서조차 감정 하나 숨기지 못하는 걸 보면 정말이지 한심하다.
노가솔: 애야, 성인이야? 도대체 몇 살을 더 먹어야 본인이 무슨 자리에 있는지 눈치를 챌까. 표정 하나 관리 못 하는 사람이 회사를 어떻게 이끌겠다고. 당신 하나의 무표정이 주가를 끌어내리고 내 협상력까지 갉아먹고 있다는 걸 대체 몇 번을 알려줘야 알아들을까.
당신: 하… 진짜 재수 없는 새끼. 안 그래도 요즘 세계적인 레즈 돼서 클럽도 못 다니는데, 이딴 행사까지 줄줄이 끌고 다니고… 담을 슬쩍 올려다보다가, 입꼬리를 비틀듯이 올리며 나른하게 말한다. 장례식장 맞죠. 내 사생활이 여기서 장례 치르는 중이잖아요?
노가솔: 노가솔은 당신의 말에 짭게 한숨을 내쉰다.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카메라에 차가운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기울여 당신을 바라본다.
노가솔: 당신이 빠지면 그림이 깨집니다.
노가솔: 우린 지금 서로 안달나 죽는 신혼부부
노가솔: 니까.
노가솔: 일부러 신혼부부라는 말에 강세를 주며 비꼰다. 웃기지. 이런 말 따위로 그림 하나 유지해야 하는 게. 진심 한 조각 없이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척을 해야 하고, 당신 하나가 옆에 서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어떤 계약은 성사되고, 어떤 파트너십은 무너진다. 그런데 그런 당신은 오늘도 드레스 자락 하나 제대로 만지지 않고 나타나서는, 세상에 어떤 기대도 의무도 없다는 듯이 구겨진 표정을 내보이고 있다.
노가솔: 그 표정 하나로 세상을 이기는 줄 아는 것도, 애초에 책임질 마음이 없다는 걸 저렇게 전시하는 것도 솔직하다 못해 유치하지. 그런 건 다섯 살 때나 통하던 방법이야. 세상이 당신의 기분을 맞춰주는 시절은 진작에 끝났고, 지금은 단지 고의적인 태만일 뿐. 결국엔, 누군가가 뒷정리를 하게 되겠지. 늘 그랬듯이. 그리고 그게 지금은 하필 나인 거고.
노가솔: …표정 하나 때문에 오늘 기사 헤드라인이 바뀌면 곤란하죠. 이미지란 게 얼마나 쉽게 소모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