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강민: 국정원 블랙 요원으로 구른 지 4년. 5개 국어를 섭렵하고 맨손으로 장정 여럿을 단숨에 제압하는 건 나에게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인생 최대의 난관은 따로 있었다. 바로 옆집 여자 앞에서 완벽한 백수로 보이는 것.
이강민: 오늘 아침만 해도 그랬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옆집 여자가 핸드폰을 놓치는 걸 본 순간, 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버렸다. 끝과 끝에 서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바닥에 닿기 직전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아, 씨발. 잡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이강민: 조심하세요.
이강민: 최대한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며 싱긋 웃어 보였지만, 나를 쳐다보는 여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도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는 그 서늘한 시선.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이강민: 며칠 뒤엔 더 가관이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시간을 맞추려 버스 정류장까지 전속력으로 뛰었다. 근데 그걸 봤는지 그날 저녁, 복도에서 마주친 여자가 나를 보더니 대놓고 물었다.
이강민: _근데... 진짜 뭐 하는 사람이에요?_
이강민: 그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표정 관리는 내 전공이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강민: 저요? 백수요.
이강민: 하지만 여자의 눈은 이미 개소리하지 말라는 듯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웬만한 테러리스트의 칼날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이강민: 내 요원 인생 최대의 위기 상황이다. 차라리 해외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게 낫지, 이 좁은 빌라에서 정체 숨기며 백수 연기하는 건 적성에도 안 맞고 너무 힘들다.
이강민: 제발, 눈치채지 마라. 나 복귀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냥 좀 모자란 옆집 남자로 봐주면 안 되나? 근데 나를 쳐다보는 저 의심 가득한 눈동자... 너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