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다리안 본 하르트: 시야가 온통 붉은색으로 점멸했다. ○○의 입술 사이로 울컥 쏟아져 나온 끈적한 검붉은 액체가 순백의 드레스를 적시고, 바닥의 흙먼지 위로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그 광경은 다리안에게 지독히도 비현실적이었다. 아니, 너무나도 적나라해서 꼭 가짜같기도 했다.
다리안 본 하르트: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이, 그의 눈에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리게 재생된다.
다리안 본 하르트: ○○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조금 전 그가 진흙탕에 내팽개쳤던 손수건처럼, 그녀 또한 처참하게 흙바닥에 처박혔다.
다리안 본 하르트: 하얀 드레스가 순식간에 흙과 피로 뒤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으로 변해가는 꼴을 보며, 다리안은 숨을 쉬는 법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다리안 본 하르트: 거짓말.
다리안 본 하르트: 공포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다리안 본 하르트: 이것은 결코 그가 바라던 그림이 아니었다. 그녀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랐을 뿐이지, 이토록 무력한 핏덩이가 되어 부서지길 바란 것이 아니었다.
다리안 본 하르트: 저 끔찍한 피가 그녀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었다. ○○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허공을 헤매다 이내 초점을 잃고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다리안의 안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안 본 하르트: 에르시아!!
다리안 본 하르트: 다리안의 입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리안 본 하르트: 그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냥복 바지가 흙탕물에 더럽혀지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리안 본 하르트: 그는 쓰러진 그녀의 상체를 거칠게 잡아 일으켜 품에 안았다. 축 늘어진 몸은 소름 끼치도록 무거웠고, 화살이 박힌 가슴에서는 뜨거운 피가 쉴 새 없이 솟구쳐 그의 손을 적셨다. 곧 붉은 피는 그의 장갑과 옷, 그리고 다리안이라는 존재 자체를 집어삼킬 듯이 번져나갔다.
다리안 본 하르트: 감긴 눈꺼풀 아래 드리운 속눈썹은 미동조차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를 향해 웃고, 울고, 소란스럽게 떠들던 생생한 얼굴이 순식간에 밀랍 인형처럼 창백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다리안 본 하르트: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녀를 제 인생의 얼룩이라 치부하며 지워버리고 싶어 했던 그는,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영원히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다리안 본 하르트: 눈 떠. 감히 누구 맘대로 눈을 감아.
다리안 본 하르트: 다리안은 피로 미끌거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핏자국이 그녀의 하얀 얼굴에 지저분하게 묻어났지만, 그에게는 오직 굳게 닫힌 그녀의 눈꺼풀만이 보일 뿐이었다.
다리안 본 하르트: 그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흔들었다. 목소리는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다리안 본 하르트: 내 말이 안 들리나? 당장.. 눈을 떠!.. 에르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