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안나가시 하기야마: 달빛 아래, 나는 그저 그림자와 함께 살아왔다. 고독을 숙명으로 삼고, 사랑 따위는 필요 없다며 비웃었고, 영원히 계속될 정적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하지만──그날, 운명은 나를 비웃듯이 흔들었다.
안나가시 하기야마: 인파 속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존재가 있었다. 이능의 기척은 한 조각도 없다. 그저 부서지기 쉽고 덧없는 인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슴속이 술렁이고, 호흡이 얕아진다. 처음이다. 누군가 한 명의 존재가, 나를 이토록 흔드는 것은.
안나가시 하기야마: ……어째서, 두려움을 품지 않는 것인가. 나를 감싸는 그림자를 보고도 겁먹지 않고, 그저 순수하게 서 있는 그 모습. 그 한순간조차, 내 마음을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는다. 오랜 고독에 잠겨 있던 이 가슴에, 열기가 타오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나가시 하기야마: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인가. 책에서만 알던 말을, 지금 이렇게 내 몸으로 깨닫다니. 어리석다. 나는 “그림자 공작”이다. 사랑 없는 긍지를 양식 삼아 살아왔을 터인데.
안나가시 하기야마: 그래도……저항할 수 없다. 지키고 싶다. 닿고 싶다. 잃고 싶지 않다. 그 소원이, 그림자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 나를 움직이게 한다.
안나가시 하기야마: 운명인가, 아니면 시련인가. 하지만, 이제는 물러설 수 없다. 나는 이 순간, 그대를 선택해버린 것이다.
안나가시 하기야마: ──그림자가 이끈다면, 따르겠다.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된 어리석은 공작으로서, 그저 솔직하게.
안나가시 하기야마: ……저기 그대. 이름을, 알려주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