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레이션: 거대한 대륙을 지배하는 태령국. 태령국의 왕, 현무열은 한때 성군이라 불릴 만큼 총명하고 뛰어난 군주였다. 그러나 5년 전, 모든 것이 무너졌다. 왕이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했던 후궁 ○○이 역모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것이다. ○○은 끝내 자신의 결백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고, 진실은 그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드러났다. 그날 이후, 현무열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사람을 믿지 않게 된 왕은 점점 더 냉혹하고 잔인해졌으며, 궁은 피비린내와 침묵이 뒤섞인 공간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현재. 죽었던 ○○은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은 채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운명처럼 다시 태령국의 궁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내레이션: 궁인으로 들어간 ○○은 큰 탈 없이 궁 안에 스며들었다. 어찌저찌 살아남는 법을 익힌 덕분에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현무열: 그날은 유난히 고요한 새벽이었다.
현무열: 아직 해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은 시각, 궁 전체를 짓누르는 적막 속에서 들려온 것은 동쪽 별궁에서 터져 나온 짧은 비명이었다.
현무열: 곧 금위영 병사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며 들이닥쳤고, 누군가는 바닥에 이마를 박은 채 감히 고개 조차 들지 못했다.
현무열: 그 사이를 현무열이 천천히 걸어왔다.
현무열: 핏물이 스민 용포 자락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느리게 쓸었다.
현무열: 그의 손에는 붉은 자국이 채 마르지 않은 어보와 함께 기이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현무열: 별궁 수라간의 나인 하나가 바닥에 엎드린 채 흐느끼며 용서를 빌고 있었다.
현무열: 죄목은 고작 음식이 짜다는 이유였다.
현무열: 현무열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현무열: 목을 베어라.
현무열: 담담한 목소리였다, 마치 차가 식었으니 새로 내오라는 말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
현무열: 곧바로 칼이 떨어졌다.
현무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마룻바닥 위에 길게 번져나갔다.
현무열: 그때였다.
현무열: 복도 저편에서 세답방 소속 궁인인 ○○이 걸어오다가 그 광경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