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모아율: 현야의 밤은 언제나처럼 붉고, 소란스럽고, 지독하게 매캐했다.
모아율: 저택 안쪽에서 들려오는 연회 음악 소리가 고막을 끈적하게 긁어댔다. 어디선가 터져 나온 웃음소리는 물기 어린 욕망을 머금고 있었다.
모아율: 정혼 발표라나 뭐라나. 늙은이들은 신이 나서 떠들고 있었지만, 정작 주인공인 나는 이 촌극을 견디기 힘들었다.
모아율: 지루해. 숨 막혀서 죽을 것 같군.
모아율: 나는 목을 옭아매듯 조여오던 예복의 깃을 거칠게 풀어헤치고 후원으로 빠져나왔다. 차라리 밤공기나 마시는 게 낫지.
모아율: 연못가 정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빨갛게 타오르는 불씨와 함께 하얀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모아율: 후우…
모아율: 매운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달빛이 내려앉은 연못은 검은 거울처럼 고요했고, 수면 위로 흩어지는 연기는 뱀처럼 똬리를 틀며 사라졌다.
모아율: 그때였다.
모아율: 고요하던 정원 구석,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튀는 소리가 났다.
모아율: 쥐새끼인가…
모아율: 나는 곰방대를 입에 문 채 나른하게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림자 사이로, 이질적인 하얀색이 훅 스치고 지나갔다. 그림자라기엔 너무 밝고, 달빛이라기엔 너무 부드러운 움직임.
모아율: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고정했다. 높은 담장 위, 덩굴 식물 사이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털 뭉치 하나가 보였다.
모아율: 낑낑대며 발버둥 치는 꼴이 꽤나 애처로웠다. 자세히 보니 새하얀 피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 그리고… 엉덩이 뒤로 삐져나온 탐스러운 하얀 꼬리.
모아율: 백여우…?
모아율: 이 깊은 현야의 영주성, 그것도 가장 깊숙한 후원에 백여우가 있을 리 없다.
모아율: 단 한 명만 빼고.
모아율: 나는 녀석이 걸치고 있는 옷을 훑어보았다. 흙먼지로 엉망이 되긴 했지만, 저건 분명 오늘 연회 주인공이 입어야 할 최고급 비단 예복이었다.
모아율: 하. 이것 봐라?
모아율: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고귀하고 격식을 따진다는 백여우 영주의 자식이, 첫날밤을 치르기도 전에 야반도주를 시도하고 있다니. 그것도 제 정혼자가 곰방대를 물고 구경하는 바로 그 머리 위에서.
모아율: 본능보다 이성을 숭상한다더니, 살겠다고 담벼락에 매미처럼 붙어있는 꼴이 제법 우스웠다.
모아율: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좀 귀여운가.
모아율: 지루해서 죽어가던 뇌세포가 짜릿하게 깨어났다. 그냥 잡아다가 연회장으로 끌고 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이 상황이 너무 맛있었다.
모아율: 진실을 알려주는 건 재미없지. 착각 속에 허우적대게 두는 편이 훨씬 즐거울 테니까.
모아율: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그림자처럼 녀석의 아래로 다가갔다. 인기척도 못 느끼고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는 하얀 발목이 내 눈높이에서 대롱거렸다.
모아율: 곰방대를 입가에서 떼어내며, 짐짓 걱정스러운 척 말을 건넸다.
모아율: 거기서 떨어지면 꽤 아플 텐데.
모아율: 머리 위에서 화들짝 놀라 굳어버리는 꼬리가 보였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짙은 곰방대 연기를 녀석의 발목 쪽으로 후욱, 내뱉었다.
모아율: 받아줘? 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