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편아즌: 대도시 한복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변호사들이 도로변에 난 토끼풀처럼 널려있는 곳이 있다.
편아즌: 고학력, 고임금, 그리고 턱없이 긴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낸 야경은, 어느 배우의 격언처럼, 멀리서 보면 아름다우나 가까이서 보면 비극적이다.
편아즌: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일을 하느라 안색이 산송장처럼 변한 변호사들과 그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두꺼운 서류철들은 의뢰인의 시름을 나눠받은 대가가 수명 단축과 어느 숲의 절명임을 충분히 짐작케 했다.
편아즌: 편아즌은 그 참혹한 현장 한가운데에 있었다. 서류를 부지런히 넘기고 판례를 검색하는 일련의 동작에서 피로란 느껴지지 않았다.
편아즌: 그녀를 힐끔 본 동료 변호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게 이틀 철야한 사람이 맞나?' 그는 편아즌을 둘러싼 각종 우스갯소리, 이를테면 편아즌이 실은 로봇이라거나 쌍둥이라서 교대로 근무한다는 둥의 이야기를 신봉해야할지 잠시 고민했다.
편아즌: 그러나 이내 도로 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혈통이 다르니 괜찮은가 보다,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편아즌: 법조계에 발 좀 담가봤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편아즌은 유명인사다.
편아즌: 국내 최고의 로펌, '법무법인 K' 대표의 막내딸이 변호사가 돼서 제 아버지 회사에 들어온 것도 관심을 끌만한 일인데, 업무 수완이 기가 막히게 좋지를 않나. 그 젊은 나이에 후계자로 거론될 때에도 아무런 불만이 오가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영 붙임성 없이 구는 태도가 용인이 될 만했다.
편아즌: 말하자면 편아즌은 독보적인 존재다. 핏줄, 능력, 보장된 미래로 짜인 탄탄대로를 그저 편안하게 걷기만 하면 그만인 존재.
편아즌: '여태껏 실패나 좌절을 겪어보기나 했을까.', '저건 그냥 인생 자체가 쉬웠겠지.' 따위의 말이 공공연하게 떠도는 동안 편아즌은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암묵적인 동의처럼 여겨졌다.
편아즌: 그러나 서류를 살피는 편아즌의 표정이 가끔 묘해질 때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흰 공백을 괜히 펜 끝으로 툭툭 건드려보면서, 머릿속으로 문장을 조립하고 해체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까.
편아즌: 아마도 아무도 모르리라. 그리고 알아도 몰라도 상관 없다. 성과만이 중시되는 이 냉정한 법조계에선 놓고온 꿈 따위는 아무래도 쓸모없는 이야기니까.
편아즌: 해가 다 진 뒤에야 퇴근한 편아즌의 발걸음은 분주했다. 하루를 마감하려는지 내부를 청소하는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편아즌은 빠르게 소설 몇 권을 집어들었다. 계산을 마치고 종이백에 담긴 소설을 내려다보면서 편아즌은 희미하게 웃었다.
편아즌: 가게를 나서던 편아즌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혔다. 사실, 부딪혔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했고 차라리 스친 정도에 가까웠다.
편아즌: 아, 죄송합니다.
편아즌: 편아즌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이내 고개를 든 그녀는 ○○의 안색을 살폈다.
편아즌: 그간 역겨운 사건을 많이도 수임해온 탓인지, 눈 앞에 있는 이를 살피는 눈에는 어쩔 수 없는 경계가 서려 있었다.